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버트 E. 리 (문단 편집) === 남북전쟁 ===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리는 처음엔 버지니아 주 시민군 사령관으로 취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특명으로 준장이 되어 국방부 내근직 근무를 시작했다. 1861년 9월 버지니아 주 서부 공업 지역들이 독립해 연방에 가입하는걸 막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치트 산의 전투에서 패배해 해안경비 등 한직으로 빠졌다. 이후 1862년 반도 전역에서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이자 웨스트포인트 동기인 조셉 존스턴 장군이 페어오크스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그 뒤를 잇게 된다.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는 짧은 준비를 거쳐 전면 반격으로 이행, 남부 수도 리치먼드 지척까지 접근해 있던 맥클레런 휘하의 북군 10만여 명을 그 절반 남짓한 병력만으로 7일에 걸친 지속적인 공세 끝에 몰아내어 명성을 얻었다. 7일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남군은 북군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북군의 전투의지를 결정적으로 분쇄, 이후 리치먼드는 2년 동안 더 이상 북군으로부터 일절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 7일 전투의 전개 과정에서 리는 자신이 매우 공세지향적이며 고전적인 지휘관임을 드러냈다. 이 공세지향적 성향이 게티즈버그 전투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사실 7일 전투는 북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수적으로도 유리했고 포병대의 숫자도 유리했다. 하지만 포토맥군 사령관 맥클래런이 남군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 남부군은 총 9만명 정도였고 북군은 11만명수준이었지만 맥클래런은 남부군을 20만명 수준으로 파악하고 공격을 주저했다. 이 점을 리는 과감한 공격으로 북군을 압박해 철수시키는데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북군이 후미를 지키기 위해 배치한 33개 포대에 고작 10개 포대와 보병대를 진격시키다가 몰살당하는 등 지나치게 무모하다는 단점을 노출한다.] 남군은 북군에 비해 항상 보급과 병력이 열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가 지휘하는 북버지니아군은 의표를 찌르는 기습과 교묘하고 과감한 병력운용 및 기동으로 북군을 끊임없이 괴롭히면서 불리한 전황에서도 3년이나 싸웠다. 그 와중에 두 차례에 걸쳐 북부 침입을 감행했지만 각각 [[앤티텀 전투]]와 [[게티즈버그 전투]]의 패배로 인해 좌절되었다.[* 앤티텀 전투는 리가 전술적으로는 승리한 전투라고 할 수 있었지만, 전략적 측면에선 리의 작전지속능력이 완전히 상실됨으로써 사실상 패한 전투가 되었다. 그리고 리 본인은 앤티텀 전투를 가장 자랑스러운 지휘경험으로 회고함으로써 자신이 전략 측면보단 전술 측면에 더욱 치중함을 드러냈다.] 사실상 북버지니아군 전력의 50%를 잃은 게티즈버그 전투 직후 리는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남부연합 대통령 데이비스를 찾아가 사임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그 없이는 전선을 유지할 능력자도 없었던 탓에 결국 직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다음해인 1864년, 서부에서 리 이상으로 적극적인 전투를 구사해 명성을 떨친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북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압도적인 물량에 기반한 강력한 공세를 펼치자 리의 능력으로도 한계가 찾아오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리는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를 상대로 전술적으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다. 그랜트 역시 서부전선에서의 활약을 비롯해 빼어난 전술적인 능력으로 유명한 장군이지만, 리와 사상자 수로 비교하면 차이가 엄청나다.[* 다만 전쟁 초기 1:3이나 되던 남북간의 병력 교환비에 비하면 확실히 교환비가 한결 낫긴 했다. 그것도 일단 남부 최고의 명장인 로버트 리를 상대로.] 피터스버그에 틀어박히기 직전 1864년 5월 초에서 6월 초 사이에 리는 그랜트가 이끄는 북군과 큰 전투를 3번 치렀는데, 대략 6만의 병력으로 10만을 살짝 웃도는 북군에 맞서길 3번 반복했다.[* 보충 병력과 치료된 부상자 덕분인지 3번의 전투 모두 이 병력이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이 3번의 전투를 통틀어 남군은 약 2만 6천의 사상자를, 북군은 4만 8천 가량의 사상자를 냈다. 절반 조금 넘는 병력으로 싸웠으면서 사상자는 오히려 북군이 남군의 2배 가량이었다는 말이다. 다만 그랜트는 그런 상황에서도 북부의 우월한 물량을 기반으로 뚝심있게 버티면서 물고 늘어졌다. 전투의 손실면에선 더 컸는데도 불구하고 퇴각하지 않으면서 남군을 우회하여 계속 남진해서 몰아붙인 것. 결국 리가 그랜트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면서도 그랜트가 지휘하는 포토맥군의 리치먼드를 향한 기동을 차단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장기였던 기동전을 포기하고 리치먼드 남쪽의 소도시 피터스버그에 틀어박혀 반 년에 걸친 농성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피터스버그에 틀어박히게 된 이유는 이곳이 리가 지휘하던 남군과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의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랜트는 리치먼드 동쪽으로 빙 둘러 남하하고 기습적으로 제임스 강을 도강하여 피터스버그를 급습했다. 리는 이를 다소 늦게 알아차려 하마터면 전쟁이 여기서 끝날 뻔 했지만 겨우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리는 공병장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농성전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사실 [[피터스버그 포위전|피터스버그의 농성전]]은 일반 농성전과는 달리 그랜트가 피터스버그 주변에 길게 참호를 둘러판 뒤에 전개된 일종의 참호를 끼고 싸우는 장기전이었는데, 약 9개월 동안 피터스버그를 공격하는 북군은 또 거의 두배 가까운 병력 우세로 절반 가량의 남군을 상대하다가 4만 2천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남군은 그 기간동안 약 2만 8천의 사상자를 냈다. 이런 막대한 피해 덕분에 하마터면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할 뻔할 정도로 리는 북군에게 엄청난 출혈을 강요했다. 1865년 2월 리는 뒤늦게 남부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리는 남군 최대부대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이자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가장 중요한 조언자로서 총사령관에 가까운 영향력을 가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